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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의 어린시절(1883~1971) 본문
코코샤넬의 생애
코코 샤넬 ( Coco Chanel 출생 이름 :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Chasnel) 또는 가브리엘 보 누루 샤넬 (Gabrielle Bonheur Chanel), 1883 년 8 월 19 일 - 1971 년 1 월 10 일 )은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이자 기업가이다. 그녀가 만들어낸 샤넬 브랜드는 세계 최고의 패션 브랜드로 현재도 판매, 영업되고 있다. 20 세기 초부터 패션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임시 활동 정지를 거쳐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대표적인 패션 디자이너로 계속 활동했다. 그녀의 인생 전반기에 그녀의 디자인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과 맞지 않았던 세계의 패션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성 의류에 저지 원단들을 도입하여 일상생활의 편리함과 패션 스타일을 양립하였고, 리틀 블랙 드레스 (LBD) 개념의 보급 등 그녀가 패션에 남긴 유산은 현대의 패션에도 아주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스포티하면서 캐주얼하고 세련된 의상이 여성의 표준 스타일로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고급 여성 의류의 고정적인 틀을 넘어 영향력을 더욱더 넓히어, 보석, 핸드백 디자인, 향수까지 제작을 하였다. 향수 샤넬 No.5는 그녀를 상징하는 제품이 되었다. 또한 자신이 디자인 한 유명한 'C'인 2 문자를 조합한 모노그램은 1920 년대부터 사용되어 지금도 샤넬 사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그녀는 ' 타임 '지 20 세기의 가장 중요한 100 명의 패션 디자이너로는 유일하게 나열되어있는 정도이다.
샤넬은 제 2 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프랑스 점령기간 동안 독일 외교관이자 첩보원이었던 한스 귄터 폰 딩크 라게 (Hans Günther von Dincklage) 남작 ( 영어 ) (Freiherr)과 교제하며 독일 당국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독일의 패배 후에 배신자들로 추축국에 대한 협력자로 기소된 가운데 샤넬은 간신히 처벌을 면했지만, 이 독일 협력 행위는 전후의 그녀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종종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시 중에 샤넬은 패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전시 후 몇 년 동안 스위스에서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와 업무를 재개했다. 전시 후에도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고 그 제품은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1971 년 1 월 파리의 호텔 리츠에서 사망했다.
코코샤넬의 출생
가브리엘 보 누루 샤넬은 1883 년, 세탁부 우제니 · 잔 두보루 (Eugénie Jeanne Devolle 다음 잔)의 아들로서 프랑스의 멘에 루 아르 주 소 뮈르의 수녀회 ( Sœurs de la Providence )가 운영하는 자선 병원에서 태어났다. 가브리엘은 쟌느와 알베르 샤넬 (Albert Chanel)의 둘째 자녀이며, 언니 줄리아가 1 년 전에 태어났다. 알베르 샤넬은 각지를 돌며 작업복이나 속옷을 행상인에게 받아 일하고 있었으며 정 주소를 가지지 않고 시장이 있는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알베르가 잔 두 보루와 결혼한 것은 1884 년의 일이다. 이것은 잔의 가족에 의해 설득되어 진행되었다. 가족은 알베르와 결혼시키기 위해 비용을 지불했다. 가브리엘 샤넬의 출생 신고는 "Chasnel"고 기록되었다. 이때 쟌느는 컨디션 불량으로 신고에 참석할 수 없었으며, 알베르는 부재중이었다. 부모 부재하에 대리인의 손에서 열린 출생 신고에 성의 철자가 잘못 등록된 것은 아마도 단순히 기록상 실수이다. 알베르와 쟌느 사이에 차남 세 여자가 한 집은 브리 브라 가야 르드 "한 방만 집에서 콩나물처럼 살고 있었다.
어머니의 사망
가브리엘이 12 세 때 어머니 쟌느가 사망했다. 코코 샤넬은 어머니가 32 세의 나이에 결핵 으로 사망했다고 후에 주장하고 있지만, 다시 사인의 정확한 진단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빈곤, 임신, 그리고 폐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 알베르는 두 아들을 농장 노동자로 보내고 딸 3 명은 오버 지누의 성모 마리아 성심 회 ( religieuses du Saint Cœur de Marie )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다. 성모 마리아 성심 회는 "버려져 고아가 된 소녀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해 주는 등 가난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수도회였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규율을 부과했고 늘 검소하게 생활하도록 길러졌지만, 여기에서 바느질을 배운 것으로 이해되며 그녀가 만드는 작품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녀에게 고아원에 보내진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경험이었으며, 후에 전기 작가와 기자들이 그녀에게 인터뷰를 갔을 때도 그곳 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프랑스 작가 에드먼드 샤를 루는 비쉬에 살던 시절에 샤넬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내가 어떤 식으로 느끼고 있는지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런 감정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런 것은 열두 살 때 경험한 인간은요, 일생 동안에 몇 번이라도 죽을 것 같은 거야. "
18세가 되자 오버 지누 고아원을 나와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다음으로 물랑 마을의 가톨릭 여자 기숙사에 맡겨졌다.
코코샤넬 어린시절의 허구
샤넬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 특히 어머니의 사망한 후 거기에 다양한 매력적인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이 같은 '허구'는 무엇이냐 하면,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가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미국에 가서 자신은 두 명의 이모 (이 아줌마들은 소설 속의 인물이며 실재하지 않는)에 맡겨졌다 든가, 생년은 1883 년이 아니라 1893 년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중간 이름 인 누루 ('행복'이란 뜻)는 세례식 때 그녀를 세례 판 위에 날랐다 수녀가 미래의 행복을 기원하며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지만, 세례 증서에는 가브리엘의 이름밖에 없고, 이것도 창작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