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든 정보노트
디자이너 코코샤넬이 남긴 패션스타일 본문
저지 원단
샤넬의 첫 번째 성공은 기계로 만든 니트 소재인 저지 원단을 여성 의류의 소재로 한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때까지 뉴 저지는 주로 양말과 스포츠 (테니스, 골프, 비치 용의 옷)에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양재에서 사용하기에 너무 일상적인 원단이라고 생각한 데다 니트 구조는 직물에 비해 취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디자이너에게서도 외면당하고 있었다. 샤넬이 대량 저지 원단을 발주한 것은 로디 사 (Rodier)였다. 로디 사는 남성용으로도 미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저지 원단을 여성 의류에 사용하는 샤넬의 아이디어에 주저하지도 않고 당초에는 이 주문을 거절했지만 샤넬은 이 저지 원단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샤넬이 이 저지 원단을 사용하여 개인용으로 디자인 한 옷을 보고 로디는 샤넬의 판단을 옳다고 판단했다. 샤넬의 초기 울 소재의 저지 여행용 정장은 카디건 재킷 그리고 주름치마와 로우 벨트가 있는 풀오버 탑과 조합되어 있었다. 이에 낮은 굽 신발을 결합 앙상블은 고급 여성 의류의 캐주얼 룩 되었다.
샤넬에 의한 고급 패션에 저지 도입은 두 가지 이유에서 성공했다. 하나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위해 다른 소재가 부족한 것. 다른 하나는 여성들이 더 간단하고 실용성 있는 옷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샤넬은 움직이기 쉬운 저지 정장과 드레스는 실용성 있게 만들어져 몸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했다. 이것은 당시 여성이 전쟁에 협력하는 간호사로서 공무원으로서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던 곳에서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그녀들의 일은 몸을 많이 움직여야 했고, 출퇴근 시 기차와 버스, 자전거를 타기에도 편했다. 그녀들은 하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입을 수 있는 복장을 원했다.
슬라브의 영향
폴 포와 레 와 마리아노 폴 투니 ·이 · 마 도라소 같은 디자이너들은 1900 년대에서 1910 년대 초반에 오디 쿠티르 민족적 디자인을 도입했다. 샤넬은 이 추세를 이어받아 1920 년대 초 슬라브 풍의 디자인을 도입했다. 이때 샤넬 옷의 붙어있는 비즈 자수는 러시아의 마리아 빠브로브나 공작부인 (샤넬의 옛 애인 드미트리 파블로 비치 대공의 누나)가 설립 한 봉제 회사 키트 미르 (Kitmir)에 의해 독점적으로 나타났다. 샤넬의 초기 컬렉션은 키트 미르에 의한 동양적인 스티치와 서 양식화된 민족 모티프의 융합이 강조되었다. 1922 년 이브닝드레스에 자수가 있는 머리 스카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머리 스카프 외에도 이 시대의 샤넬 옷 루바슈카 (roubachka)로 알려진 러시아 무지크 (muzhiks : 농민)의 복장을 나타내는 긴 벨트로 고정된 스퀘어 넥 블라우스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브닝드레스는 종종 빛나는 크리스털과 black jet 자수가 장식되었다.
샤넬 정장
1923 년에 처음 도입된 샤넬 트위드 정장은 편안함과 실용성을 추구하여 디자인된 유연하고 가벼운 모직과 모헤어의 트위드 및 저지 또는 실크 안감의 블라우스와 재킷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샤넬은 당시의 패션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소재를 단단한 것으로 하거나 어깨 패드를 사용 하진 않았다. 가슴 다트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몸을 빠르고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적당한 넓이의 네크라인을 디자인하고 기능적인 포켓을 더했다. 더욱 편하게 하기 위해 스커트는 벨트 대신 허리에 그 로그 랭 스테이가 붙었다. 더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것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잼은 고객이 선 상태에서 어깨 높이에서 팔짱을 낀 자세로 열렸다. 샤넬은 모델에게 산책하고 버스 계단을 오르는 것을 시키고 플랫폼을 오르게 하고 차체 높이가 낮은 스포츠카를 타는 것으로 몸을 굽히게 하는 테스트를 실시했다. 그녀가 목표로 한 것은, 샤넬 정장을 입은 채, 몸의 일부를 노출하지 않고도 여자가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고객 각각 정장이 편안한 상태로 일상 활동을 더욱더 편안하고 쉽게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 조정했다.
카멜리아
카멜리아(동백)라고 하면 모두가 떠올리는 것이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의 문학 작품 "라 트라비아타 (일명 카멜리아의 연인)( La Dame aux Camélias )"이었다. 샤넬은 젊은 시절부터 "라 트라비아타" 이야기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동백은 고급 창녀인 춘희를 연상시키는 꽃이며,이 작품에서 동백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극의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순수한 정절의 향기를 나타낸다. 샤넬의 카멜리아는 순수한 흰색에서 자아내는 우아한 품격, 삶, 사랑에 열정적이고 당당한 현대 여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동백은 라 메종 샤넬과 동일시되게 되었다. 샤넬은 1933 년에 흰색을 자른 검은 정장에 처음 장식 요소로 카멜리아를 사용 했다.
리틀 블랙 드레스
오늘날에도 착용된 리틀 블랙 드레스 (LBD)의 개념은 저지 한 벌을 따라 한 것으로 샤넬 패션 용어로 빌어서 종종 말해진다. 1912 년부터 1913 년까지 여배우 슈잔누 · 올 랜디 (Suzanne Orlandi)가 샤넬이 제작 한 '하얀 페탈 컬러가 있는 단단한 검은 벨벳의 가운 '을 입었다. 그녀는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은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었다. 1920 년 샤넬은 오페라 관객을 관찰하고 모든 여성에게 검은 드레스를 입게 하겠다고 자신에게 맹세했다. 1926년 보그 잡지는 샤넬의 긴소매의 리틀 블랙 드레스 사진을 게재하고 이를 가르송 ( garçonne 'little boy'look)이라고 명명했다. 보그 잡지는 이 같은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은 센스 있는 여성들에게 필수품이라 할 수 있다며 필수품 중에 한 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이 드레스의 기본적인 디자인을 널리 보급하였고 역시 세간에 넘쳐나게 됐다. 한편, 이 심플한 디자인은 남성의 기자들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일으켰다. 그들은 "더 이상 가슴이 아니라 더 이상 배도 없고 더 이상 엉덩이도 없다. 20 세기의 이 순간에 여성 패션은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리틀 블랙 드레스가 인기를 얻은 이유의 일부는 그것이 도입된 시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1930 년대 대공황의 시대이며, 여성들은 저렴한 패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샤넬은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 억만장자처럼 활보할 수 있도록 했다고 자랑했다. 샤넬은 낮에 모직 또는 셔닐의 리틀 블랙 드레스, 그리고 밤에 새틴 , 크레페 또는 벨벳 리틀 블랙 드레스를 만들게 되었다. 어느 날, 샤넬은 "나는 감히 검정을 사용했습니다. 이 색깔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검정은 다른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