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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디올(1905~1957)의 생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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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디올(1905~1957)의 생애

J이든 2021. 2. 8.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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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디올 ( Christian Dior , 1905 년 1 월 21 일 - 1957 년 10 월 24 일 )는 1950 년대에 활약한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이다. 그가 설립한 패션 브랜드도 「크리스천 디올」 혹은 「디올」라는 브랜드명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찬디올15세때 (출처 구글검색)

크리스천 디올의 출생과 성장과정

1905 년 크리스천 디올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방 망슈 그랜빌에서 모리스 디올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료 생산 사업을 하고 있었고 그의 가정형편은 유복했다. 그가 다섯 살 무렵에 가족은 파리로 이주한다. 그러나 여름 바캉스 때마다 노르망디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부모는 아들에게 외교관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따라서 1920 년부터 1925 년 12 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정치를 배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밝히진 않았지만 게이였다. 결국 1928 년 에 아버지로부터의 원조를 받아서 친구와 함께 작은 아트 갤러리를 가지고 파블로 피카소와 막스 자 코브 등의 그림을 전시했다. 하지만 3 년 후, 세계 공황에 의해 그의 아버지가 그 자산을 잃은 것을 알게 되었고, 갤러리도 폐쇄를 피할 수 없게 된다. 1937 년 디올은 로베르 피게에게 고용되어 그곳에서 피게의 수집을 위한 디자인을 하는 기회를 얻었다. 훗날 디올은 "피게에게서 간단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인 것을 알게 되었고 인하여 진정한 우아함이 나타나는 것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디올이 피게를 위해 디자인했지만 그중에는 예를 들면 'Cafe Anglais'등이 디올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같은 시기의 피게 아래에서 피에르 발망도 있어고 디올과 발망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징병에 의해 디올은 피게 아래를 떠나게 된다. 1942 년이 되어 군대에서 돌아온 디올은 류 시안과 루론 패션 하우스에 참가한다. 같은 시기의 루론 아래에는 피에르 발망도 있었으며 여기에서 디올과 피에르 발망 은 주요 디자이너였다.

 

2차 세계 대전 아래에서 강요받았던 디올

제2 차 세계 대전 발발 아래에서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는 점령되었고, 그 사이 프랑스 패션 산업을 지속하기 위해 경제적, 예술적인 이유 등으로 루론 아래에 있던 디올은 나치 고관과 그에 협력하는 프랑스인 부인을 위한 드레스 등을 디자인하도록 강요받았다. 또한, 이것은 장 파뚜, 잔 란봔, 니나 리치 등 기타 많은 브랜드에서와 같이 마찬가지로, 그 옷을 전시 하에서 경영 유지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가 그러한 일을 강요받았던 반면,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고 있던 그의 여동생 캐서린(1917- 2008 년)이 게슈타포에 의해 구속되어 라 벤스 브 뤼크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어 버렸다.

 

크리스천 디올의 브랜드 창설

1946 년 12 월 8 일에, 마르셀 부탁의 후원을 바탕으로 디올은 자신의 쿠튀르 메종을 파리 8구역 에비뉴 몽테뉴 30 번지에 열고 자신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듬해 1947년 2월 12일에 첫 컬렉션을 발표한다. 당초에 이 컬렉션은 "코 로르" Corolle ( 식물학에서 유래한 단어로 "화관"을 의미한다.)의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하퍼의 바자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카멜 스노가 이 컬렉션을 다시 새로 평했다. 그 이름은 그 유명한'뉴 룩 New Look'이라는 문구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아라비아 숫자 8을 닮은 가늘게 짠 웨스트와 느긋한 플레어스커트를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전시 자재 부족으로 인해 프랑스의 쿠츄리들이 한 벌의 옷에 사용할 천의 면적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었다. 반면 아낌없이 천을 사용한 점도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 디올의 '뉴 라인'은 또한 제2 차 세계 대전 중에 직물이 배급제였기 때문에 주류로 사용되었다. 모나(The boxy)보다 여성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초기에는 디올의 무릎까지 덮는 형태의 디자인에 항의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이전 시대에서 의류용 직물은 부족하였고, 이로 인해 이러한 디자인은 볼 수 없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벌의 드레스와 정장을 만드는데도 아낌없이 원단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발과 항의가 많이 있었다. 이 시위는 사진으로 남아있어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여성들과 그중에는 새로운 모습을 착용한 여성이 거리에서 옷을 다 뜯어 분리하는 것까지 있었다. 이러한 시위는 전후의 물자 부족 해소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용해졌다.

어쨌건 간에, 디올의 '뉴 룩'은 여성의 복장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파리를 다시 패션의 중심지로 부흥시켰다. 전후의 패션 지침서를 보여주었다. 디올은 1947 년부터 1957 년까지 11 년동안 파리 의 오뒤 쿠튀르 계의 정점으로 군림한다. 그는 매해 시즌 라인이라는 테마에 따라 작품을 발표했다.

 

크리스천 디올의 갑작스러운 사망

디올은 휴가지 이탈리아 몬테 카 티니 테르 메를 방문했지만, 그곳에서 1957 년 10 월 23 일에 급사했다. 일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사인은 물고기의 뼈를 먹고 질식한 후 심장 마비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타임지의 사망 기사는 카드게임을 한 후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디올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교계의 Baron de Redé 가 쓴 글에는 "심장 마비의 원인은 활발한 성생활에 있었다"라는 글이 있고 소문이 항간에 흐르고 있던 보인다. 어쨌건 간에, 지금도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사망 이후

수석 디자이너로 급히 브랜드를 이은 것은 디올 아래에서 경험을 쌓고 있던 당시 21 세의 이브 생 로랑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는 이브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브는 후계자로 충분한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징병을 계기로 브랜드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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