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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체 생애와 베르사체 브랜드

J이든 2021. 2. 22.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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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생애

본명 조반니 마리아 베르사체 (Giovanni Maria Versace) 수 지아니 베르사체 ( 이탈리아 : Gianni Versace , 1946 년 12 월 2 일 - 1997 년 7 월 15 일 )는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패션 브랜드 베르사체의 창업자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며 예술적인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동시대 이탈리아 밀라노를 출발로 전 세계의 패션을 석권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 이탈리아 : Giorgio Armani ), 지안 프랑코 훼레 ( 이탈리아 : Gianfranco Ferre ) 등과 함께 "밀라노의 3G"라고도 불리었다. 특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정반대의 작풍과 패션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끼리에서 라이벌이라고 주목받았었는데 한 때 서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수집하다 부딪치는 일까지 있었다. 90 년대의 슈퍼 모델 붐의 주동자로도 시대의 큰 흐름을 견인했다. 무대 의상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친구였던 에릭 클랩튼과 다이애나 , 나오미 캠벨 , 듀란 듀란 , 마돈나 , 프린스 , 엘튼 존 , 셰어 , 스팅 등 다양한 유명 인사를 위한 의상 디자인도 하였다. 음악 업계, 특히 인기 뮤직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한 최초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도 평가된다. 많은 유명 인사의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밀라노와 파트너 안토니오 다미코는 그들 자신도 국제적인 다양한 파티 장면에서 유명인사였다. 지아니 베르사체는 또한 그 비극적이고도 감각적인 최후를 맞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7 년 7 월 15 일 플로리다에 있던 자신의 별장 앞에서 갑자기 총격을 당해 50 세 사망했다. 범인은 연쇄 살인범이었고 베르사체는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어린 시절 베르사체 성장과정

지아니 베르사체 수 조반니 마리아 베르사체는 1946 년 12 월 2 일에 이탈리아의 레지오 칼라브리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아버지와 양재사 어머니 프란체스카, 그리고 오빠의 산토 베르사체와 여동생 도나텔라 베르사체와 함께 성장한다. 그는 누나가 있었었지만, 파상풍이 적절히 치료되지 않은 것으로 12 세의 나이에 사망하였고 혼자가 되었다. 밀라노의 역사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레지오 칼라브리아에 자라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레지오 칼라브리아 고등학교 Liceo Classico Tommaso Campanellad에서는 교과 과정을 완료하지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 대해 배웠다. 또한 앤디 워홀에 영향을 받았다. 밀라노에서 어머니는 12 명의 재봉사를 고용하여 봉제업을 영위하였고, 그도 어려서부터 거기에 출입하고 있었다. 26 세에 밀라노로 이주하여 패션산업에서 일하기 시작하기 이전에는 건축에 대해서도 배웠다.

성공의 시작

1973 년 베르사체는 이탈리아의 기성복 메이커 "Genny" 젊은이를 위한 라인 "Byblos"의 디자이너로 취임하고 성공을 거둔다. 뒤이어 1977 년에는 같은 "Genny" 더욱 실험적인 라인을 만들고 "Complice" 디자이너가 되었다. 1978 년,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에서 최초로 여성을 위한 컬렉션을 밀라노 Palazzo della Permanente에서 발표한다. 그의 첫 번째 컬렉션은 같은 해 9 월에 다시 선보였다. 또한 같은 1978 년에 첫 번째 매장을 밀라노의 Via della Spiga에 오픈한다.

패션 제국

1978 년에 밀라노에 첫 매장을 오픈 한 후 즉시 패션 현장에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디자인은 화려한 색채와 대담한 프린트, 섹시한 커팅에 의해,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색채와 단순한 형태에 따른 패션 의류를 일신했다. 동시에 그의 작품 "고전적인 고급스러움과 과도한까지 섹시 함의 조합"은 수많은 상과 함께 다양한 비판도 그에게 가져왔다. 밀라노의 창작 태도는 "패션의 규칙에 과감하게 도전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베르사체의 라이벌이라고 주목했던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스타일과 비교하여 "아르마니의 옷은 아내를 위해, 베르사체의 옷은 정부에게"라고 표현했다. 1978 년 베르사체는 가족의 협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의 동생 산토 사장에 여동생 도나텔라가 부사장이 되었다. 도나텔라는 특히 창작면에서 베르사체의 시야를 더욱 넓혀 역할을 하고 막바지 회사에 중요한 컨설턴트와 같은 역할도 했다. 게다가 베르사체는 도나텔라의 남편이자 전직 모델의 폴 벡을 남성복 디렉터로 고용하였다. 베르사체 의한 패션 혁신의 하나로서 유명한 것이 1982 년의 매우 가벼운 사슬 갑옷을 이용한 "Oroton"라고 이름 붙여진 드레스다. 이 소재는 디자이너를 대표하는 소재의 하나로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 자신이 경험해온 여성 의류 테일러링의 경험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영국의 사빌 로우에 시작되었고 남성보다 남성성으로 보이는 스타일은 획을 긋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등에 다양한 영향을 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디자인에 모티브로 반영되어 있었으며 브랜드 로고인 메두사의 머리, 그리스 강의 굽이침 등에서 보이고 있었다. 현대 미술도 밀라노의 중요한 영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그래픽 프린트는 로이 리히텐 슈 타인과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베르사체 메두사 로고(출처 구글검색)

베르사체의 일상생활용품으로의 영역확대

1982 년 밀라노는 자신의 사업 확대로 보석과 일상생활용품의 디자인에 나타난다. 일상생활용품은 패션과 마찬가지로 매우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가구, 도자기, 그리고 실내 장식용 직물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베르사체는 이러한 자사의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물의 컨트롤을 항상 스스로 지고 있었다. 1989 년에는 파리의 산디 카에 가입하고 "Atelier Versace"의 이름으로 패션쇼 분야에 진출한다. 또한 메인 라인보다 가격을 억제한 디퓨전 라인 'Versus'를 같은 해에 시작한다.

베르사체의 성장

이 무렵이 되면, 베르사체는 특히 국제적인 유명 인사와의 관계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컬렉션 할 때에 홀에 앉은 사람들이나 혹은 광고 캠페인에 채용하는 등 형태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또한 1990 년대 초반부터 이른바 슈퍼 모델 붐의 주동자인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나오미 캠벨과 크리스티 털링턴 , 린다 에반젤리스타 같은 모델들을 중심으로 컬렉션의 런웨이와 광고 캠페인 모두 기용해 화제를 휩쓸었다. 90 년대에는 브랜드의 가장 유명한 아이콘 중 하나인 화려한 프린트 원단이 차례로 등장한다. 보그의 로고를 다양하게 배치한 1991 년의 "Vogue"와 1993 년"Florida"등이 그것이다. 특히 1991 년 가을 겨울 시즌에 등장한 "Barocco"( 바로크 무늬)는 정평으로서 현재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1997 년 베르사체가 비극적인 형태로 사망 한 때 전까지 그 회사의 가치는 807 만 달러에 달해 전 세계에 130 점포가 생긴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여동생인 도나텔라가 헤드 디자이너로 브랜드를 운영했다. 브랜드는 자신의 이름을 딴 "Gianni Versace"에서 "Versace"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베르사체의 무대 의상

베르사체는 그의 생애에서 커리어를 통해 다양한 의상을 스테이지나 아티스트를 위해 디자인했다. 무대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라고 말했고 그렇게 제작된 의상은 모두 그의 스타일이었다. 대담한 색상과 드레이프 등 다양한 장식, 그것에 백과사전 급 패션 후미의 지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한 밀라노의 작품으로는 밀라노 La Scala Theatre Ballet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의한 밸리 음악 '요제프 전설'의 공연 (1982 년)과 타노 도니 체티의 오페라 '돈 빠 스크레 "가 있다. 그 밖에도 스위스 발레 단체 Bejart Ballet 5 개의 공연 ( "Dionysos"(1984), "Leda and the Swan"(1987) "Malraux ou la Metamorphoses des Dieux"(1986) "Chaka Zulu"(1989) "Ballet du XXme Siecle")에서도 협력하고 있다. 1990 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카 프릿 쵸 공연을 위해 의상 디자인을 했다. 인기 뮤직에서도 1992 년 엘튼 존의 월드 투어를 위해 의상을 디자인했다.

지아니 베르사체 살인 사건

1997 년 7 월 15 일 마이애미 비치에 있는 별장 입구에서 앤드류 쿠나난 (Andrew Cunanan)에 의해 사살되었다. 베르사체는 걸어서 5 분 정도 거리의 뉴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탈리아 신문을 읽고 바캉스 중의 아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범인인 쿠나난은 필리핀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를 가진 28 세의 남자로 IQ 가 147이고 7 개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수재였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가난하면서도 우수한 아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사립 고등학교에 보냈다. 캘리포니아 대학 샌디에이고에 진학했지만, 아버지가 전직 처와의 실패한 가족 관계를 버리고 필리핀으로 귀국해 버린다. 쿠나난은 아버지를 따라갔지만 필리핀에서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절망하여 대학을 중퇴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게이 빌리지에서 부자들을 상대로 남창을 시작한다. 화술이 뛰어나 청년인 쿠나난은 캘리포니아의 게이 커뮤니티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영화계와 재계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를 얻게 됐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가 끝난 후 사교파티에서 쿠나난의 당시 연인이었던 변호사를 통해 알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르차세 살해 몇 달 전에 삼각관계로 복잡하게 얽혔던 건축가 이자 전직 해병대원을 미니애폴리스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 경찰에 쫓기는 가운데, 시카고에서 현지의 부동산 재벌로 알려져 있던 70 대 남성을 폭행 끝에 목을 쓸어 잘라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았다. 또한 도주차량 강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뉴저지에서 한 명을 사살하고 마이애미로 달아났다. 베르사체를 살해한 2 주 후, 경찰에 포위되고 있던 가운데 잠복하고 있던 보트하우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별장 Casa Casuarina는 사후 판매되고 통신 회사 사장이 소유하고 호텔 등으로 쓰였다. 이후 1 억 2500만 달러에 매물로 나왔지만 구매자가 붙지 않았고, 2013 년 현재 1 억 달러에 가격 인하되었다. 2013 년 가을에 미국의 사업가 조셉 나카슈가 구입을 했다. 그 후 2015 년 4 성급 호텔 The Villa Casa Casuarina로 개업을 했다. 나카슈는 이스라엘 태생의 시리아계 유대인으로 미국 의류 기업 Jordache의 경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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